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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충전소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야 보이는 것: 수요와 공급이 서로를 기다리는 구조

수소충전소가 없어서 수소차를 못 산다고 합니다. 수소차가 없어서 충전소를 늘리기 어렵다고도 합니다. 두 주장이 동시에 맞습니다. 이 교착은 사업계획서에 없습니다.

  • 수소충전소 사업은 양면 교착 구조입니다. 충전소가 충분하지 않으면 수소차 수요가 생기지 않고, 수소차가 충분하지 않으면 충전소 운영이 어렵습니다.
  • 이 교착이 사업계획서에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수요와 공급을 각각 독립 변수로 놓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두 변수가 서로를 결정합니다.
  • 정부 보조금은 교착의 한쪽을 먼저 움직이게 합니다. 그러나 보조금이 끝난 뒤 교착으로 돌아오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사업 설계의 핵심입니다.

충전소를 열었는데 차가 없습니다

100억 규모의 수소충전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부지 확보, 설비 구매, 인허가, 배관 공사까지 완료하고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사업 계획 단계에서 충전소 인근 수소차 등록 대수와 예상 일일 충전 횟수를 분석했습니다. 운영 6개월 뒤 실제 이용률은 예측의 절반을 밑돌았습니다.

수소차 운전자에게 물었습니다. 충전소가 집과 직장에서 너무 멉니다. 우회해서 충전하느니 다음 기회를 기다립니다. 수소차 판매 담당자에게 물으면 반대편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객이 충전 인프라 부족을 우려해 구매를 미룬다고 합니다. 두 이야기가 동시에 맞습니다. 충전소가 늘지 않으면 수소차 수요가 생기지 않고, 수소차가 늘지 않으면 충전소 추가 투자가 어렵습니다.

이 구조가 사업계획서에서 사라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수요 예측과 공급 계획을 각각 독립 변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2027년 수소차 등록 대수 X만 대'라는 시장 예측을 고정값으로 놓고, 그 수요를 충족하는 충전소 수를 계산합니다. 두 변수가 서로를 결정한다는 사실은 계획 어디에도 없습니다.

교착 구조는 왜 사업계획서에서 사라지는가

수요와 공급이 서로를 결정하는 구조는 수소충전소에만 있지 않습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공유 플랫폼의 공급자와 수요자, 소프트웨어 생태계의 개발자와 사용자가 모두 같은 구조를 갖습니다. 경제학자 장 티롤과 장 샤를 로셰는 2003년 양면 시장 이론에서 이 구조의 핵심을 정리했습니다. 한쪽 면의 수요는 다른 쪽 면의 공급에 달려 있고, 두 면이 동시에 성장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업계획서에서 교착이 사라지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시장 조사 단계에서 수소차 수요를 외생 변수로 취급합니다. '정부 보급 목표 X만 대'나 '인구 대비 예상 전환율'을 근거로 수요를 고정합니다. 이 수요가 있으면 충전소가 필요하고, 충전소를 지으면 사업이 된다는 논리가 완성됩니다. 실제로는 수소차 수요가 충전소 밀도에 달려 있고, 충전소 밀도가 수소차 수요에 달려 있습니다.

이 교착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사업을 시작하면 이용률 부진이 반복됩니다. 인식한다고 해서 교착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식하면 교착을 푸는 순서를 설계할 수 있습니다.

보조금이 끝난 뒤의 구조를 먼저 설계해야 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수소경제 활성화 로드맵(2019)을 통해 수소충전소 구축 비용의 50% 이상을 보조금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운영합니다. 이 보조금이 교착의 공급 면을 먼저 움직입니다. 충전소 수가 늘어나면 수소차 구매 장벽이 낮아지고, 이것이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보조금은 교착을 한시적으로 푸는 수단입니다. 보조금이 끝났을 때 자생적으로 수요와 공급이 성장하는 구조가 없으면, 지원이 줄어드는 시점에 교착이 다시 시작됩니다. 수소충전소 사업에서 자생 구조의 핵심은 고정 수요처입니다. 버스, 트럭, 물류 차량처럼 운행 거리가 길고 충전 패턴이 일정한 상용차가 고정 수요처가 됩니다. 이 차량들은 운행 노선에 맞춰 충전소를 이용하므로, 충전소 운영자 입장에서 이용률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교착 구조에서 신사업을 시작하는 실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외부 힘(보조금, 규제, 파트너십)으로 먼저 한쪽 면을 움직입니다. 그 과정에서 외부 힘 없이도 유지되는 고정 수요처 또는 고정 공급처를 찾습니다. 고정 수요처가 확보되는 시점에 외부 힘에 의존하는 비중을 줄입니다. 이 순서가 없으면 보조금이 끝나는 시점이 사업의 위기가 됩니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수소충전소처럼 수요와 공급이 서로를 결정하는 신사업에서 사업계획서에 필요한 것은 수요 예측이 아니라 교착을 깨는 순서 설계입니다. 지금 진행 중인 신사업에서 수요와 공급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제하고 있다면, 외부 힘 없이 자생할 수 있는 고정 수요처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점검 목록

  • 신사업 수요 예측에서 공급 규모가 수요에 영향을 준다는 피드백 루프가 반영돼 있는가
  • 보조금이나 파트너십 같은 외부 힘이 끝난 뒤에도 운영되는 자생 구조가 설계돼 있는가
  • 고정 수요처(버스, 트럭, 물류 차량 등)를 먼저 확보하는 계획이 사업 초기부터 포함돼 있는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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